글러브 2011년 내가 본 영화들

청각 장애우들을 소재로 한 영화.

어린시절 청각 장애우는 아니었지만, 지체, 정신 장애우 형과 가까이 지내서 그런건지...

이렇게 장애우들을 소재로 한 영화는 즐겨보는 편이기도 하다.

예전에 노인체험을 해본다고 색안경에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장치를 하고 휠체어를 타고 하루종일 생활해 봤던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몸이 달라져도 너무나도 불편했었는데.

과연 이 영화에 나오는 친구들의 모습처럼 청각 장애인 경우 난 그들처럼 밝고 열심히 살 수 있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너무 어이없게 결론이 난 것이 조금 불만스럽긴 했지만...그것조차 실화라면 난 할 말 없다....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 2011년 내가 본 영화들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면서 볼 수 있었던 영화.

사실 김명민의 능글맞은 연기와 오달수의 능청스러운 연기...그리고 한지민의 객주로써의 모습은 정말 맘에 들었다.

이렇게 사극처럼 보이지만 은근 현대적인 요소를 많이 넣은 영화가 참 좋다.


현 대한민국의 재정정책과 관련하여. 내 생각은.

지난 학기 재정학 수업을 들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문제 중 하나는, 과연 정치인들은 서민들의 복지에 대해서 얼만큼 생각하고 이를 위한 정책을 집행하느냐에 대한 문제였다. 사실, 정치인들의 목적함수는 당연히 정권 재 창출에 있으며 이들은 시민들의 표를 원한다. 당연히 표를 위해서는 선심성 공약을 남발할 수 있으며, 일단 당선되고 안되면 말지 식의 공약을 내새울 수도 있다. 또한 다른 당의 공약이 충분히 논리적이고 시의적절하다 할지라도 자신들의 표밭을 우려하여 매도하고 얼토당토 않은 것으로 치부하여 본질을 흐릴 수 있는 유인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또한 정치인들의 경우 이익집단과 결탁하여 서로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작업을 끊임없이 시도할 수 있는 유인도 존재한다. 이로인해 시민들의 주머니에서 작은돈들을 빼내어 그것을 긁어모아 큰 돈을 만들고 서로의 정치적 자금 및 이익의 원천으로 활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부조리함에 대항하여 시민들이 싸울 유인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사실상 정치인이라는 대리인을 내세우는 순간부터 시민들은 합리적 무지(rational ignorance)를 인정하고, 그러한 메트릭스 내로 안주하게 되어버릴 수 밖에 없다. 일부 사람들이 이를 탈피하고 그릇된 정치인, 이익집단(언론인, 기업인, 심지어는 교묘한 단어의 위장술로 자신들의 본질을 숨긴 단체들까지 전부 포함하여)의 부조리함을 공개하기 위해 노력한다 할지라도 이로인해 들어가는 비용 대비 승리했을 경우 가져올 수 있는 보상이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사회전체의 후생을 증가시킬 수는 있을지언정, 개인의 후생수준 또는 효용을 증가시켜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어찌보면 메커니즘 디자인적 측면에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메커니즘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정치인들이 해야할 몫인데, 과연 자신들의 목을 스스로 조를 수도 있는 그러한 관계법령을 그들이 통과시킬 것인가? 그들은 이러한 행동을 하지 않을 충분한 유인을 갖고 있다.

결국 소수의 이익집단, 정치인들이 다수의 시민들을 착취하는 구조로 진행되는 것은 어찌보면, 냉정하게 바라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가치판단의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정의(justice)라는 개념도 갖고 있다. 물론 이기적 동기에 의해서 철저하게 자신의 효용수준 극대화를 추구하는 자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할 수도 없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가치판단의 기준과 정의라는 개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얼마 전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강연을 했던 마이클 샌들 교수의 "What is right things to do"강의 당시의 모습이 생각난다. 과연 대한민국 사람들 중 강연에 참가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것은 왜였을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끝으로...대한민국의 전체 인구 중 정치인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또한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수는 얼마나 될까? 과연 그들의 이익을 증대시키고 그들의 효용을 증대시켜주는 세상이 올바른 세상일까? 아니면. 힘이 없어서 또는 정보의 비대칭성에 의해서 또는 그러한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침묵하고 있는 다수의 시민들의 효용이 증가하는 것이 옳은 세상일까...난 마지막 세상을 위한 손을 들어보이고 싶다. 되도 않은 대규모 재정정책을 위한 채권의 발행과 경기부양을 명목으로 강행한 어찌보면 사업성 평가 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정책, 그리고 기업의 투자를 촉진시킨다는 명목하에 이루어진 법인세 인하, 부자들의 지갑을 열도록 감세조치를 단행했던 정책들 그로 인해 부족해진 세수를 충당하기 위해(물론 표면상으로는 그저 세금이 부족해서) 카드의 소득공제를 없애버리고, 담배값을 인상하는 등의 정책은 과연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할 듯 싶다.

무상급식 관련 논쟁의 핵심은 가치관의 충돌이다 -이준구 교수님- 2011 신문 스크랩

무상급식 관련 논쟁의 핵심은 가치관의 충돌이다
무상급식 이슈는 기본적으로 한정된 자원을 어느 곳에 우선적으로 배정하는 것이 바람직한지의 문제다. 
전면 무상급식 실시를 위해 좀 더 많은 세금을 낼 수도 있고, 다른 데다 써야 할 돈을 이쪽으로 끌어다 써야 할 필요도 생길 수 있다. 
사람마다 우선순위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따라서 무상급식이 바람직한지의 여부에 대한 생각도 다를 수 있다. 
다른 정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도 차분한 토론을 통해 이견을 해소해 나감으로써 적절한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일부 인사들은 이 문제를 극단적인 이념적 대립구도로 몰아넣음으로써 나 죽기 아니면 너 죽기의 싸움판을 만들고 있다. 무상급식이라는‘망국적 포퓰리즘’과의 싸움에 선봉장을 자처하고 나선 오세훈 서울시장이 그 대표적 예다. 망국적 포퓰리즘을 여기서 막지 못한다면 나라가 무너져 버릴 것이라고 외치는 그에게서 이념투사의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런 이념적 대립구도를 통해 보수층을 결집하는 정치적 효과를 얻을지 모르지만, 생산적인 토론이 전혀 이루어질 수 없게 만드는 불행한 결과를 빚고 있다.

원래 정치인들이 과장에 능하다는 것은 잘 알지만, 어떻게 여기에다 ‘망국적’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갖다 붙였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니, 우리나라가 무상급식 하나 실시해서 망할 정도로 허약한 나라라는 말인가? 아니면 무상급식 실시하는 데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 나라 살림이 당장 거덜이라도 날 것이라는 말인가? 이런 얼토당토않은 과장법의 속셈이 반대파를‘나라 망치려 드는 사람’으로 몰아가려는 데 있음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 시장은 무상급식보다 더 시급한 과제가 많다고 주장한다. 여론조사를 해 보면 가장 시급한 과제로 드러나는 것이 학교 안전이라고 말한다.또한 공교육이 부실해지면 사교육비가 많이 들어가니 방과후 학교도 강화해 달라는 요청도 많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현장을 다니면서 들어보면 학교의 낙후된 시설부터 개선해 달라는 요구도 많았다고 덧붙인다.나는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을 존중한다. 무상급식과 이 과제들 사이에서 어떻게 우선순위를 부여해야 할 것인지는 차분한 토론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발언에는 논점을 교묘하게 흐리려는 어두운 의도가 숨겨져 있다. 교육에 사용될 예산의 틀 안에서만 무상급식의 우선순위를 논의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당연한 말이지만, 서울시 전체의 예산이라는 틀 안에서 무상급식의 우선순위를 논의해야만 적절한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나는 오시장이 이런 단순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구도에서 무상급식 문제에 접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자신이 유리한 입지를 선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구도를 선택했을 것이 분명하다.

서울시 전체의 예산이라는 틀 안에서 논의할 때, 무엇보다 우선 도마에 올라야 할 것은 오 시장이 개인적 애착을 갖고 있는 사업들이다. 예를 들어 한정된 예산이 디자인 서울, 한강 르네상스, 아라뱃길 같은 사업들에 우선적으로 투입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무상급식에 우선적으로 투입되어야 하느냐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무상급식 문제를 이런 틀에서 논의하게 되면 자신이 애착을 갖고 있는 사업이 차질을 빚게 되는 문제가 바로 발생한다.

바로 이런 두려움 때문에 오 시장이 한사코 무상급식에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상급식 문제와 관련해 한 가지 역설적인 점은, 이것의 실시로 인한 1차적 혜택이 중상류 계층에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세금을 더 걷는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는 급식비를 내다가 내지 않게 되는 중상류 계층이 바로 그만큼의 혜택을 얻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왜 보수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을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퍼주기식 복지정책을 펴자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들은 부유층에게 감세 혜택을 주면 우리 경제가 살아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감세 혜택이나 급식비 면제 혜택이나 그게 그건데 왜 하나는 되고 다른 하나는 안 된다고 입에 거품을 무는것일까?

설사 세금을 더 걷게 된다 하더라도 중상류 계층에 큰 손해가 돌아가는 일은 없다. 과거에 급식비로 내던 것을 세금으로 바꿔서 내게 되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과연 어떤 근거에서 이와 같은 변화가 우리 경제에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그저 해로운 정도가 아니라 나라가 기울어질 정도로 해로운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사코 반대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내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만한 이유를 생각해 내기 힘들다. 그들은 나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한사코 무상급식에 찬성하는거요?” 나는 이 질문에 서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다.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들이 떳떳하게 급식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린이들의 자존감을높여 주는 데서 오는 이득이 그렇게 만들어 주는 데 드는 비용보다 훨씬 더 크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나는 무상급식에 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회복지제도의 혜택을 받는 사람은 자신이 사회의 도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의 수치심을 갖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기 때문에 그런 점도 있고, 도움을 받는 처지에 있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심정, 즉 자괴심(自愧心) 때문에 그런 점도 있다. 따라서 정부가 아무리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다 해도 혜택을 받는 사람이 느끼는 수치심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내년부터 무료급식 대상자를 학교에서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사무소에서 선정하기 때문에 전면 무료급식을 실시할 필요성이 없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학교에서는 누가 무료급식 대상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제한적인 무료급식을 계속한다 하더라도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가 수치심을 느낄 이유가 없다는 근거에서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무료급식의 대상자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고, 그 점에서 자존감의 상실을 경험하게 될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사람은 사회복지제도의 수혜자들이 어느 정도의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수치심을 느껴야만 스스로 열심히 일해 사회복지제도의 혜택을 받지 않으려는 유인이 생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유명 보수논객인 머레이(C. Murray)는 미국의 사회복지제도가 실패한 사람들에게 무분별한 도움을 줌으로써 ‘실패할 유인’(incentive to fail)을 준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라면 사회복지제도의 수혜자들이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드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만약 빈곤이 순전히 개인의 책임이라면 사회복지제도의 수혜자들이 어느 정도의 수치심을느끼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할지 모른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 모두가 스스로의 게으름 때문에 혹은 앞날에 대한 준비의 부족 때문에 빈곤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은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이유에 의해서 가난해진 사람도 있고, 사회적 역학관계에서 어쩔 수 없는 힘에 밀려 가난해진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사회도 개인의 빈곤에 대해 일부의 책임이
있는 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빈곤에 대해 사회도 책임의 일부를 져야 한다면, 사회복지제도의 수혜자들이 느끼는 수치심을 최소화해 주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복지제도는 일종의 사회적 보험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도 수혜자들에게 쓸데없이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 사회복지제도는 사회적 안전망(social safety net)을 구축한다는 뜻에서 도입된 제도다. 우리가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할 수 있듯, 뜻하지 않게 빈곤의 구렁텅이로 빠질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 안전망을 쳐놓아 두자는 뜻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사회복지제도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험금을 탈 때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사회복지제도의 혜택을 받으면서 수치심을 느껴야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무상급식의 경우에는 수치심을 느끼는 주체가 어린이라는 점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 어린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손톱만큼의 책임도 없다. 가난한 부모를 둔 것이 죄가 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들이 무상급식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마음의 상처를 입게 만든다면 그것은 이만저만 부당한 일이 아니다. 모든 어린이가 가정의 경제상황과 관계없이 떳떳하게 무상급식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무상급식의 문제를 보편적 복지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다. 보편적이든 선택적이든 복지는 복지일 뿐이며, 그렇다면 이에 따르는 수치심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유한 가정의 어린이도 함께 혜택을 받는다 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어린이 때문에 무상급식 제도가 도입되었다는 사실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보편적 복지의 관점에서 전면 무상급식을 실시하자는 주장은 물타기를 해서 진실을 감춰 보자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에서 학교에서의 급식이 가치재(merit goods)의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무상으로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것은 그것이 가치재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이 최소 9년의 교육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에서 의무교육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재벌의 자제도 무상으로 교육의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무교육이기 때문에 무료로 제공하는 서비스가 반드시 수업에만 국한되어야 할 논리적 이유는 없다. 수업을 받기 위해 필요한 교과서도 무료로 제공될 수 있고, 수업 도중 하게되는 식사도 무료로 제공될 수 있다. 현재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들에게 제한적인 무료급식을 실시하는 이유는 모든 어린이가 영양 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있음이 분명하다. 모든 어린이가 영양 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급식이 바로 가치재의 성격을 갖는다는 뜻이다. 가치재라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로 정의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모든 어린이가 가치재로서의 무료급식에 대해 당당한 권리를 갖는다는 점이다. 이제는 무료급식이 시혜의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물타기에 의해 모든 사람이 함께 얻게 된 혜택도 아니다.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와 부유한 가정의 어린이가 똑같이 아무런 자존감의 손상 없이 당당하게 무료급식의 혜택을 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 내가 무료급식을 가치재의 차원에서 접근하자고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우리의 새싹들이 부당한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해맑게 자랄 수 있다면 그 비용은 얼마든 정당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면 무상급식의 실시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물론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얼마든 있을 수 있다. 아라뱃길을 뚫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4대강을 시멘트로 처바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상급식과 관련된 논쟁의 핵심이 바로 이와 같은 가치관의 충돌에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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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채무, 세금으로 갚을 돈만 200조 -매일경제- 2011 신문 스크랩

국가채무, 세금으로 갚을 돈만 200조…전체 절반 달해

매일경제 입력 2011.02.08 17:33 | 수정 2011.02.08 19:27 누가 봤을까? 50대 남성, 전라


◆ 한국은 부채공화국 ◆정부가 지난해 쓸 돈이 부족해 발행한 적자국채는 23조3000억원에 달했다. 올해에는 22조원의 적자국채를 찍어야 한다. 적자국채는 지출수요가 세금 등으로 거둬들인 수입을 초과할 경우 이를 충당하기 위해 발행하는 국채다. 고스란히 빚이 된다. 금융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29조원에 달하는 '슈퍼 추경'을 편성했던 2009년에는 무려 35조4500억원의 적자국채를 찍었다. 불과 3년 새 약 80조원의 새 빚이 생기는 셈이다. 

지금까지 국가채무는 총량 위주로 논의돼 왔다. 그러나 이제는 국가채무의 질을 따져 면밀한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국가채무는 크게 '적자성 채무'와 '금융성 채무'로 나뉜다.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악성 채무인 적자성 채무다. 재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적자성 채무는 200조원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상 처음으로 전체 채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0%에 이른 것이다. 재정부에 따르면 2005~2009년 동안 늘어난 국가채무 절반은 일반회계 적자 보전에서 비롯됐다. 이런 용도로 돈을 써서 늘어난 국가채무가 56조1000억원이다. 경기 부양 목적으로 대규모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할 경우 이런 부담은 더 커진다.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아 정부 주도의 경기 회복이 필요했던 2009년이 대표적이다. 2009년 한 해에만 국가채무가 50조1000억원이 늘어났다. 이렇다 보니 적자성 국가채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2002년만 해도 적자성 채무가 전체 국가채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2%에 불과했다. 8년 사이에 적자성 채무는 4.7배나 늘어났고, 전체 국가채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포인트 상승했다. 적자성 채무는 올해부터 향후 4년간 연평균 약 10조원이 늘어난다. 재정부는 2010년 200조원에서 2014년에 253조5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매년 5% 성장을 가정한 것이어서, 목표에 미달할 경우 적자성 채무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구본진 기획재정부 재정업무관리관은 "세입 기반을 확충하고 세출을 줄여나가는 노력을 통해 4~5년 후에는 적자국채 발행을 거의 제로(0)에 가깝게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 같은 계획은 내년 총선, 대선을 앞두고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고영선 KDI 재정사회정책연구부장은 "적자성 채무를 줄이기 위해서는 지출을 줄이거나 수입을 늘려야 하는데 후자는 어렵기 때문에 지출 증가율을 둔화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비과세 특례를 과감하게 정리하려는 계획이 번번이 국회의 벽을 넘지 못하는데 선거를 앞두고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지난해 12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임시투자세액공제 등 대표적인 과세특례 규정을 부분 축소해 유지하는 등 각종 비과세 특례ㆍ감면을 유지토록 해 재정건전성 확보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초 1조9000억원으로 예상했던 개편안의 세수 증가 효과는 국회를 거치면서 1조3000억원으로 줄어들었다. 재정을 멍들게 할 포퓰리즘은 최대 경계 대상이다. 이동원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그리스가 1980년대부터 포퓰리즘적인 정책이 계속되며 국가채무 비율이 125%로 치솟았고 결국 국가 부도 위기를 맞았던 점을 되새겨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 교수는 "빚을 내서 복지 지출을 늘리다가 재정건전성이 훼손되면 결국 저소득층에 더 큰 충격이 갈 수 있다"며 "복지 지출은 한번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무상복지 확대는 국가의 성장동력을 상실케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 < 용어 > 적자성 채무 : 세출 예산의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서 적자국채를 발행한 탓에 생긴 채무다. 부동산 대출과 비교하면 담보물 같은 대응 자산이 없기 때문에 국민 부담과 직결되는 채무다. 금융성 채무 : 외환시장 안정, 서민 주거 안정 등을 목적으로 국채를 발행함에 따라 생기는 채무다. 적자성 채무와 달리 채무에 상응하는 외화자산이나 대출금 등이 있다는 차이가 있다. [특별취재팀 = 이창훈 팀장 / 정혁훈 기자 / 송성훈 기자 / 박용범 기자 / 이상덕 기자 / 전정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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